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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 커뮤니케이션과 행위

by 뿐뿐 2022. 8. 10.

사회체계란 사람들은 아닐지라도 어차피 행위들로 구성된다는 널리 확산된 견해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행위이론에 기초한 논거가 주도적인 견해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그 논거는 주관적 출발점과 체계 이론적 출발점을 연계하는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 같습니다.

사회적 행위란 베버에게는 사회적으로 지향된 의도를 통해 규정된 행위의 유형이나 행위의 특수사례입니다. 사회체계의 형성이란 파슨스에게는 바로 베버에 대한 파슨스의 시각에 따라 전혀 다른 개념으로 간주될 수 있는 행위의 창발을 위해 분석적으로 배타 분화된 성분입니다. 이에 따르면 사회체계는 행위의 유형이나 행위의 한 측면에 기초하며, 행위를 거쳐서 이른바 주체는 체계 속으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행위와 사회성 사이의 관계가 적절히 이해되었는지 그리고 특히 충분히 성공적으로 파악되었는지 검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귀 준거 체계의 이론과 복잡성 문제를 전제로 삼는다면, 이런 한정 관계를 단적으로 역전시킬 수 있는 여러 사례가 있습니다. 사회성은 행위의 특수 사례가 아니며, 오히려 행위가 커뮤니케이션과 속성부여를 거쳐서 사회체계 속에서 체계의 필수불가결한 자기 단순화를 위해 복잡성을 감소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로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중층적으로 연계될 수 있는 적어도 두 개의 정보처리장치가 있을 경우에만 기저 과정의 층위에서 재귀준거가 성립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재귀 준거는 그에 상응하는 불연속적 하부구조를 전제합니다. 이에 필요한 장치들은 그 사회체계의 요소가 될 수 없으며 그 부분 체계도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소나 부분 체계나 공히 재귀 준거를 거쳐야만 비로소 탄생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체계들은 이 처리장치의 공동작용을 산출하는 선택적 조율 과정들로만 구성됩니다. 따라서 이 체계들의 구조는 그런 조율을 지속적으로 변경시키고 재발견될 수 있게 만드는 기능만 가집니다.

이런 숙고가 곧바로 논의하는 주제에 직결됩니다. 이 상황에서 그 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산출하는 사회체계의 기저 과정은 오직 커뮤니케이션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체계의 요소들의 단위를 심리학적 시각에서 규정하는 것은 배격합니다.

그러나 이 커뮤니케이션 과정은 그 과정 자체가 산출하는 체계의 행위 및 요소들과 어떤 관계인가? 사회체계랑 궁극적으로는 커뮤니케이션이나 행위들로 구성되는가? 상이한 선택의 성공적인 연동은 그것이 해체되면 사회성도 소멸시킬 궁극적인 단위인가, 아니면 행위로서 할당될 수 있는 개별 선택이 그 궁극적 단위인가? 여기에서 일단 전적으로 하나의 차이, 즉 결정할 수 있는 질문만 놓여있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커뮤니케이션 행위를 고려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대답하려는 유혹을 뿌리치는 방법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서 궁극적 요소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나 행위가 그것에 기초하여 구축된 이론의 양식, 예컨대 심리성에서 이탈하는 정도와 같은 근본 조건을 결정적으로 각인한다고 추정합니다. 

연구 문헌들에서는 통상적인 행위 이론적 시각 외에도 커뮤니케이션이론의 시각이라는 두 가지 입장이 표방되는데, 양자 사이의 차이는 대체로 그리 심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 차이가 명확하지 않으며 또한 간단히 소거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현실로서의 사회성을 구축하는 기저 과정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과정입니다.

그러나 이 과정은 스스로를 제어하려면 행위로 소급되어서 행위로 해체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체계는 행위들이 마치 인간의 생물학적 심리적 구축을 토대로 삼아 산출되고 유지되듯이 구성된 것은 아닙니다. 사회체계들은 행위들로 분해되고 이런 환원을 거쳐서 여타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게 하기 위한 후속 과정의 토대를 확보합니다.

이에 따르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전제조건은 바로 커뮤니케이션 개념의 규명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대게 전달이라는 은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그래서 발신자에서 수신자로 뉴스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커뮤니케이션이라고들 합니다. 

전달 은유는 너무 많은 존재론을 함축합니다. 그 은유에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그가 수용해야 할 무엇인가를 넘겨준다는 연상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이 연상은 발신자 자신도 전달 내용을 상실한다는 점에서, 결국 방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미 가당하지 않은 주장입니다. 커뮤니케이션을 소유, 주고받기 그리고 물물교환 등에 비유하는 것은 커뮤니케이션을 이해하는데 적합하지 않습니다.

전달 은유는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을 전달 행위, 즉 통보에 할당합니다. 다시 말해서 통보자에게만 모든 주의력과 솜씨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통보란 선택안의 제시, 즉 하나의 자극에 불과합니다. 일단 이 자극이 수용되어 이해 과정에서 처리되어야만 커뮤니케이션이 성립합니다. 

더욱이 그 은유는 전달된 내용의 원래 메시지와의 동일성을 과장합니다. 그 은유를 사용하는 순간 우리는 전달된 정보가 발신자나 수신자 양자에게 모두 동일하다고 상상하게끔 호도됩니다. 그 은유에서 얼추 들어맞는 부분도 있겠지만, 전달 내용이 동일하다면 그런 동일성은 정보의 내용적 속성 덕분에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비로소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구성되기 때문에 보장되는 것입니다. 정보의 동일성이란 그것이 발신자와 수신자에게 제각기 판이한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합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야 합니다. 결국 전달은유에서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무엇을 통보하는 이항적 과정이라고 가정합니다. 우리는 바로 이 점에 주의하며, 따라서 그 용어부터 재조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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